데뷔 전
1959년 1월 25일 광주광역시 남구 서동 145-21에서 태어났습니다. 큰집과 같이 살았는데, 할머니가 한 집에서 두 명이 태어나면 안 된다며 둘째인 김연자의 엄마에게 밖에서 낳으라고 해서 엄마는 마당에서 김연자를 출산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발소를 했는데 김연자가 5~6세 때부터 매일 손님 앞에서 노래를 시켰다고 합니다. 단골 손님이 오면 아버지는 "연자야 노래 불러라"고 외쳤다고. 아버지는 이발소 영업이 끝난 후에 가게 안에서 1시간 동안 전축으로 이미자 노래를 틀고 김연자에게 연습하라고 한 뒤 나갔다고 합니다.
국민학교 3학년 쯤 큰엄마가 내일 광주공원에서 열리는 노래자랑에 나가라며 참가금 2~3백원을 줬는데, 당시 김연자의 용돈은 10원이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유행가 부르면 안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동요를 불렀는데, 떨어져서 참가상으로 소주 1병을 받았다고 합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 가요교실 학원 선생에게 돈이 없다고 말하니 무료로 다니게 해줘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5년을 다녔습니다. 또래 친구들은 동요를 좋아했지만 김연자는 트로트를 불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경제적 지원은 없었고, 딸이 가수가 됐다며 학교를 못 다니게 했다고 합니다. 남들은 공부하고 친구들하고 놀 때 자신은 서울에서 노래를 해야해서 아버지를 원망하고 미워했었다고 합니다. 너무 빨리 사회인이 되어버려 학생의 청춘이 없었다고. 결국 김연자는 경제적 가장 역할을 하여 두 동생을 대학에 다닐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물론 나중엔 가수가 되게 해준 아버지께 고마워한다고 합니다.
김연자 무명 시절
1974년 동양방송(TBC) <가요 신인 스타> 오디션 쇼. 매주 금요일 예심에서 뽑힌 4명이 tv에 출연해서 우수 가수로 뽑히면 메달을 따는 것입니다. 메달을 따서 올라가는 토너먼트 형식으로 이 메달을 3번 따면 "신인 스타"가 되어 1년간 TBC 전속 가수로 활동합니다.
TV를 보니 노래자랑에 의상 입고 2절 부르는 게 멋있어서 김연자는 출전 결심했습니다. 김연자는 <9월의 노래>를 불렀는데 "패티김 노래 불렀지만 이미자랑 똑같구만"이란 심사평을 듣고 떨어졌습니다. 집에 왔는데 PD가 재도전해 보라고 전화했습니다. "저 그 노래밖에 모르는데요?" 그 노래로 다시 나오래서 나갔다가 합격했습니다. 패티김 노래를 고른 이유는 광주에서 노래자랑 여기저기 다녀 보니 트로트 부르면 떨어지고 발라드 부른 사람이 붙어서라고 합니다.
당시 일본에서 엔카의 원류는 한국이란 말이 많았습니다. 일본의 토리오(trio)레코드사가 이성애 같은 한국인 가수를 데려오려고 서울에서 연 오디션에 김연자는 합격했습니다. 일본행을 어머니는 찬성하고 아버지는 반대했지만, 김연자는 당시 심적으로 힘들었고 밤무대 외의 비전이 안 보이던 생활과 가난을 벗어날 돌파구를 원했습니다. 비자가 안 나와 10달 이상 기다리다가 1977년 8월 일본에 갔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일본어도 모르고 힘들고 외롭고 한국에 가고 싶다며 매일 울며 엄마에게 전화했더니 당시 직장인 월급이 12만 엔이었는데 전화세가 30만엔 나와서 회사한테 혼났습니다. 초기엔 향수병에 시달렸습니다. 술만 먹으면 집에 가겠다며 여권을 들고 집 밖에 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동네에 택시가 잘 안 다녔고 그리고 한국이 욕먹는 게 싫어 참고 이겨냈다고 합니다.
김연자 전 남편
1978년 김연자는 방송에 출연했다가 훗날의 남편 金好植(김호식)과 처음 만났습니다. 스튜디오에서 자주 마주쳤다고 합니다. 남편은 첫눈에 천생연분이라 느꼈다 했습니다. 김연자도 처음부터 끌렸기에 같은 성이지만 본관이 다름을 확인하고 안심했습니다. 그는 재일교포 2세이자 유명 재즈 오케스트라 '클리어 톤즈'의 지휘자이자 악단장이라고 합니다.
"제가 방송무대에 출연했다가 남편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어요. 사실 제가 그때 나이도 어린데다가 낯선 외국 땅이라 모든 것이 쑥스러고, 기도 제대로 못 펴고 있었거든요.그런데 하루는 누군가가 다가와서 한국말로 아주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하는거에요. 깜짝 놀라서 돌아봤더니, 바로 밴드 지휘자였어요. 그때 누군가와 한국말로 대화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반가웠죠."
전 남편은 재일교포 2세 김호식(일본명: 오카 히로시), 지휘자 겸 앨범 프로듀서, 김연자의 매니저이자 소속사 사장, 유명 재즈 오케스트라 '클리어 톤즈'의 악단장. 예총 일본지부장. 김연자와 18세 차이며, ''김연자의 어머니와 2살 차이, 아버지와 7살 차이'입니다.
김연자가 처음으로 일본에 데뷔했을 때 악단장으로 온 그와 만났고 첫눈에 서로 끌렸고 김연자가 한국에 돌아온 후 장거리 연애와 일본 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일본 갈 비자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음반이 대박나서 일본에 가지 않고 한국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남편은 김연자의 일본에서의 성공에 공을 세웠습니다. 남편은 고교시절부터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해 가요계 지인들이 많았고 남편 때문에 김연자를 도와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남편은 김연자의 일본 내 기획사 대표를 맡아 그녀의 모든 스케줄과 수입을 관리했습니다.
"남편은 아버지처럼 인자하고 다정하게 저를 이끌어줬죠. 남편이 없었으면 일본의 김연자도 없었어요. 두 번째로 일본에 갔을 땐 아무런 신경 쓸 일 없이 노래만 부르면 됐어요. 그땐 남편이 제 매니저가 되어주었어요. 남편은 어떻게 하면 가수 김연자를 세계로 통하게 할 수 있을까 연구하는 사람이에요. 어떤 때 보면 남편이 저보다 더 제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같아요. 남편 이 야쿠자라는 등의 소문은 말도 안 돼요. 정말 자상한 사람이에요.”
싸울 때 남편이 김연자에게 "나 없었으면 너 호스티스나 하고 살았을 것"이라 말했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기인합니다.
김연자의 남편이 야쿠자라는 소문이 한국에 있었지만, 남편 본인은 그런 소문을 몰랐으며 야쿠자임을 부정했습니다.
김연자 과거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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